제4부 미래의 설계도: 선지자는 도면을 들고 현장을 걷는 사람입니다

제4부 미래의 설계도는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열일곱 권이며, 성경 5부 구조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미리 그리는 자리입니다. 다만 이 열일곱 권의 대부분은 미래 예고가 아니라 현재 진단입니다. 지어진 것이 도면과 어디서 어긋났는지를 짚고, 이대로 가면 무엇이 오는지를 말합니다.

아직 없는 것을 그리는 도면이 있습니다

건물을 짓다 보면 아직 없는 것을 그려야 할 때가 옵니다.

완공되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미리 그린 그림입니다. 벽도 다 서지 않았고 창도 달리지 않았는데, 그 그림 안에서는 이미 다 지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 공사가 무엇을 향해 가는지를 압니다.

이 그림은 짓는 사람보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더 필요합니다. 매일 흙과 철근만 보는 자리에서는 이것이 무엇이 되어 가는 중인지를 잊기 때문입니다.

성경 5부 구조에서 제4부 미래의 설계도는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열일곱 권입니다. 이백쉰 장이니 다섯 부 가운데 신약 다음으로 깁니다.

그런데 여기에 흔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예언이라고 하면 앞일을 맞히는 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언서를 펴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찾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열일곱 권을 다 읽어 보면, 앞일에 관한 말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대부분은 지금 여기에 관한 말입니다.

선지자는 감리자입니다

공사 현장에는 도면을 손에 들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벽을 쌓지 않습니다. 철근을 얽지도 않습니다. 하는 일은 하나입니다. 도면과 지어진 것을 대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어긋난 자리를 찾으면 말합니다. 여기가 도면과 다릅니다.

현장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 대개 이 사람입니다. 다들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는데 혼자 아무것도 짓지 않으면서 지적만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도면을 그리던 시절에도 그런 사람이 왔습니다. 며칠을 들여 세워 놓은 것 앞에서 여기 치수가 다르다고 한마디 하면 그 자리가 다시 뜯겼습니다. 그때는 그분이 참 미웠습니다. 다만 뜯지 않고 넘어간 자리가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도 함께 보았습니다.

선지자가 그 자리입니다.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아모스도, 새로운 계시를 들고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은 제1부에서 이미 준 도면입니다. 그 도면과 지금 지어진 것을 대조해서, 어디가 어긋났는지를 말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언서를 읽으면 같은 말이 되풀이됩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 저울추를 속이지 말라,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 새로운 말이 아닙니다. 전부 모세오경에 이미 있던 조항입니다.

미래에 관한 말은 그다음에 나옵니다. 어긋난 것을 짚은 다음에, 이대로 가면 무엇이 오는지를 말합니다. 그것이 예언입니다. 앞일을 맞히는 재주가 아니라, 도면과 현장을 둘 다 아는 사람이 내리는 결론입니다.

미움받는 자리라는 말은 비유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자기가 받아 적은 두루마리가 왕의 화로에서 한 폭씩 잘려 불타는 것을 보았고, 나중에는 진흙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성경 5부 구조에서 이 구간이 이렇게 두꺼운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어긋난 자리 하나를 말하는 데 한 사람의 평생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언서의 경고 뒤에는 거의 언제나 회복이 붙습니다. 무너뜨리겠다는 말로 끝나는 책이 드뭅니다. 무너진 다음에 다시 세우겠다는 그림이 따라옵니다. 감리자는 건물을 헐러 온 사람이 아니라 도면대로 세우려고 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언서에서 길을 잃는가

제1부에서 사람들이 멈추는 자리는 레위기이고, 제2부는 왕들의 이름이고, 제3부는 아는 몇 편만 골라 읽는 자리입니다. 제4부의 함정은 다릅니다.

여기서는 길을 잃습니다.

이유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순서입니다. 예언서 열일곱 권은 시간 순서로 놓여 있지 않습니다. 길이로 놓여 있습니다. 긴 다섯 권이 앞에 오고 짧은 열두 권이 뒤에 옵니다. 그래서 순서대로 읽으면 시대가 앞뒤로 왔다 갔다 합니다. 무너지기 전 이야기를 읽다가 무너진 뒤 이야기로 넘어가고, 다시 무너지기 훨씬 전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짚고 가야겠습니다. 소선지서는 덜 중요해서 소선지서가 아닙니다. 짧아서 소선지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배경입니다. 예언서는 거의 전부가 누군가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모르면, 같은 문장이 위로인지 경고인지도 구별되지 않습니다. 제2부 역사서를 지나오지 않고 예언서를 펴면 특히 그렇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는 말씀은 많은 분이 외우는 구절입니다([예레미야 29:11]). 그런데 이 말이 어느 자리에서 나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미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에게, 칠십 년이 차야 돌아오게 된다는 말 바로 뒤에 붙은 약속입니다. 곧 풀려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에서 집을 짓고 밭을 갈고 자식을 낳으며 살라는 말 다음에 온 말입니다. 배경을 알면 이 구절은 가벼워지지 않고 오히려 무거워집니다.

그래서 이 구간에서는 읽는 방법을 하나 바꾸시면 좋겠습니다. 한 권을 펴기 전에 그 책이 어느 자리에서 나온 말인지부터 확인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무너지기 전인가, 무너지는 중인가, 무너진 뒤인가. 셋 가운데 어디인지만 알아도 같은 문장이 다르게 들립니다.

성경 5부 구조로 보면 이 열일곱 권은 흩어진 설교 모음이 아닙니다. 한 건물의 조감도를 여러 사람이 여러 시대에 나누어 그린 것입니다.

당신 앞에 펼쳐진 성경 66권이 한 채의 건물로 보이십니까.

그렇게 보면 소선지서 열두 권은 부록이 아니라, 큰 그림의 모서리를 맡은 열두 장의 도면입니다.

도면 안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감도에는 사람이 그려집니다. 건물만 그리면 크기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서의 조감도 한가운데에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사야 오십삼 장입니다. 이 장은 한 사람을 그립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사람, 그런데 그가 찔린 것은 자기 허물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허물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이 누구를 가리키는가는 오래 물어 온 물음입니다. 그리고 성경 자신이 한 번 답한 자리가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온 한 관리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수레에서 이 대목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다가가자 그가 묻습니다.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빌립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전합니다([사도행전 8:34-35]).

물음은 그때 처음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가 그 장을 쓴 뒤로 칠백 년 동안 사람들이 같은 것을 물었습니다. 도면에 사람 하나가 그려져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그 도면을 보아 온 것입니다.

제4부의 마지막 책 말라기는 이렇게 닫힙니다.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리고 그다음에 사백 년 동안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도면은 다 그려졌는데 공사가 멈춘 시간입니다.

성경 5부 구조의 제5부는 그 침묵이 깨지는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조감도 안에 그려져 있던 그 사람이 실제로 걸어 들어옵니다.

조감도가 다 그려졌을 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일어날지는 이미 그려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