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실내 장식: 성경에서 사람이 말하는 자리

제3부 실내 장식은 욥기·시편·잠언·전도서·아가 다섯 권이며, 성경 5부 구조에서 세워진 뼈대 안쪽을 다루는 자리입니다. 앞의 두 부가 하나님이 하신 일의 기록이라면, 이 다섯 권은 그 일 아래서 사람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묻는지의 기록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자리가 여기입니다.

사람이 실제로 만지는 것은 골조가 아닙니다

골조가 다 올라가면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부터 도면이 달라집니다. 기초와 골조는 구조 도면입니다. 하중과 치수의 세계이고, 틀리면 건물이 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내 도면은 다른 것을 그립니다. 창이 어느 높이에 오는지, 손잡이가 어느 쪽에 달리는지, 아침 볕이 어디까지 들어오는지입니다.

건물의 안전을 정하는 것은 골조인데, 사람이 하루 종일 만지는 것은 손잡이입니다.

성경 5부 구조에서 제3부 실내 장식은 욥기·시편·잠언·전도서·아가 다섯 권입니다. 이백마흔세 장인데, 앞의 두 부와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나라가 서고 전쟁이 나고 왕이 바뀝니다. 그런데 이 다섯 권에는 사건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사람 안쪽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뒤집힙니다.

성경 대부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다섯 권은 사람이 하나님께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구간은 읽는 자리가 다릅니다. 앞의 두 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배우는 자리였다면, 여기는 내 말이 이미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실내가 그렇습니다. 구조 도면 앞에서는 배우고, 살아 본 방 앞에서는 알아봅니다.

다섯 권이 다루는 안쪽

욥기는 답이 없는 고통을 다룹니다. 마흔두 장 가운데 서른 장 넘게가 사람들의 말입니다. 친구 셋이 번갈아 설명하고 욥이 반박합니다. 하나님은 서른여덟 장에 가서야 입을 여시는데, 그때도 답을 주지 않으시고 되물으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끝내 설명되지 않습니다. 대신 물으시는 분이 누구신지가 드러납니다.

시편은 백오십 편의 기도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많은 것은 찬양이 아니라 탄식입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말이 찬송보다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께 따지는 말이 성경 안에 그대로 실려 있다는 뜻입니다.

잠언은 매일의 자리로 내려옵니다.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누구와 가까이할 것인가. 크고 높은 이야기가 아니라 손잡이와 문지방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첫머리에서 지혜가 무엇인지를 못 박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은 것과 지혜로운 것을 같은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전도서는 가장 서늘한 책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로 시작해서,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서늘함이 끝까지 가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들을 지킬지어다로 닫습니다.

아가는 사랑 노래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부르는 노래가 성경 한가운데 한 권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이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자리가 성경에서 감추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섯 권을 이어 놓으면 사람의 안쪽이 대체로 다 나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하루하루의 기도와 살림의 지혜와 삶의 허무와 사랑입니다. 성경 5부 구조에서 이 자리가 없으면 건물은 서 있어도 아무도 살지 않는 건물이 됩니다.

여기서는 멈추지 않고 골라 읽습니다

제1부에서 사람들이 멈추는 자리는 레위기이고, 제2부에서 멈추는 자리는 왕들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제3부에서는 멈추지 않습니다.

대신 골라 읽습니다.

시편 스물세 편은 누구나 압니다. 잠언도 몇 절은 외웁니다. 그런데 시편 백오십 편 가운데 실제로 읽은 것이 몇 편인지 세어 보면 대개 열 편을 넘지 않습니다. 욥기는 길어서 넘기고, 전도서는 읽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아서 덮고, 아가는 예배당에서 잘 다루지 않으니 그런 책이 있다는 것만 압니다.

이 구간의 함정은 좌절이 아니라 편식입니다.

오래 쓴 성경책에는 저절로 펴지는 자리가 있습니다. 손이 자주 간 쪽의 제본이 먼저 헐거워지기 때문입니다. 삼십 년 동안 성도들의 성경책을 곁에서 보았는데, 헐거워진 자리는 대개 같았습니다. 시편이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에는 이미 무너져 본 사람의 말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장에서도 병실에서도 사람들이 그리로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시편은 대개 초록 풀밭과 쉴 만한 물가입니다. 같은 책 안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가 함께 있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밝은 편만 골라 두고 어두운 편을 지나치면, 정작 어두울 때 펼 자리가 없습니다.

시편 여든여덟 편은 끝까지 어둡습니다. 탄식으로 시작한 다른 편들은 대개 마지막에 돌아서서 그래도 주를 신뢰하겠다고 말하는데, 이 한 편은 돌아서지 않습니다. 마지막 줄이 흑암으로 끝납니다. 그런 편이 잘려 나가지 않고 성경 안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실내를 밝은 방 하나만 꾸며 놓은 집과 같습니다. 그 방은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루 종일 그 방에만 있지 않습니다.

성경 5부 구조로 보면 이 다섯 권은 취향에 따라 골라도 되는 부록이 아닙니다. 사람이 실제로 들어가 사는 방들입니다.

당신 앞에 펼쳐진 성경 66권이 한 채의 건물로 보이십니까.

그렇게 보면 욥기와 전도서는 어두워서 피할 책이 아니라, 어두운 날을 위해 미리 마련된 방입니다.

탄식이 어디까지 갔는가

시편 스물두 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1])

시편에서 가장 어두운 첫 줄입니다. 그리고 이 한 줄이 천 년 뒤에 다시 들립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은 어둡게 시작하지만 어둡게 끝나지 않습니다. 뒤로 가면서 돌아서고, 마지막에는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온다는 데까지 갑니다. 첫 줄을 아는 사람은 그 시의 끝도 함께 듣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탄식은 믿음이 모자라서 나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깊은 자리에서 꺼내 쓰신 말이 시편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다섯 권은 신앙의 곁가지가 아닙니다. 사람의 안쪽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하나님이 성경 안에 남겨 두셨다는 기록입니다. 기뻐하는 말만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뒤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누가복음 24:44]). 시편을 따로 짚어 부르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올린 말들 안에도 그분을 가리키는 것이 들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경 5부 구조의 제4부는 이 방들에서 창밖을 내다봅니다. 지금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면 앞으로 무엇이 오는가. 예언서 열일곱 권이 그 창입니다.

실내가 다 꾸며졌을 때 아직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가 들어올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