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단계 결산하고 판결하는 천국사람: 마지막 물음이 우리를 처음 자리에 데려다 놓습니다
6단계 결산하고 판결하는 천국사람은 천국사람 6단계의 여섯 면 가운데 하나이며, 맡긴 분이 돌아와 물으시는 자리입니다. 마태복음의 세 비유, 곧 자기 소유를 맡기고 결산하는 사람 · 열매를 받으려는 주인 ·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는 왕, 이 셋이 자리를 맡습니다. 그런데 이 단계가 부르는 것은 결산받는 사람이 아니라 결산하는 사람입니다. 그 결산과 판결의 대상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검사할 때 다시 펴는 것은 첫 장입니다
물건이 다 만들어지면 검사를 합니다.
이때 하는 일은 만든 사람의 솜씨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도면과 맞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기준이 검사하는 사람 안에 있지 않고 종이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검사는 다투는 자리가 아닙니다. 도면을 함께 펴 놓고 실물과 대어 보면 끝납니다.
그런데 남이 와서 하는 검사보다 먼저 하는 검사가 있습니다.
만든 사람이 스스로 하는 검사입니다. 현장에서는 이것을 자주 합니다. 한 공정이 끝날 때마다 도면을 펴 놓고 자기가 만든 것을 대어 봅니다. 최종 검사에서 잡히면 늦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뜯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준이 종이 위에 있다는 것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자기 마음으로 재는 것이 아니라 도면으로 재는 것이니, 만든 사람도 자기가 만든 것을 스스로 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검사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마지막 장부터 보지 않습니다. 첫 장부터 봅니다. 눈높이선이 어디였는지, 축척이 얼마였는지. 만들면서 틀어진 자리는 대개 그 두 줄에서부터 어긋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하는 일이 처음 그린 것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천국사람 6단계는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열아홉 비유를 여섯 자리에 놓고 읽는 틀입니다. 그중 6단계가 결산하고 판결하는 자리입니다. 그날에 관한 자리이고, 비유 셋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 자리를 오해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결산을 남의 일로 두는 것입니다. 결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나는 그날 불려 가 서 있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이 단계를 아예 들여다보지 않는 분이 많습니다. 보면 겁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단계의 이름을 다시 보십시오.
결산받는 천국사람이 아닙니다. 결산하고 판결하는 천국사람입니다.
그 결산과 판결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남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오해가 하나 더 있습니다. 결산을 점수표로 읽는 것입니다. 얼마를 했는지 세고 모자란 만큼 벌을 받는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세 비유 어디에도 점수표가 없습니다. 셋이 묻는 것은 한결같이 다른 자리에 있습니다.
이 마지막 면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첫 면입니다. 정육면체에서 마주 보는 두 면은 서로 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면을 정하면 마주 보는 면이 그 자리에서 함께 정해집니다. 떨어져 있는 두 면이 아니라 한 쌍입니다. 6단계에서 드러나는 것이 1단계에서 정해진 것이라, 이 편은 다음 자리로 나아가지 않고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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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비유가 맡은 세 가지 일
천국사람 6단계에서 마지막 자리에 속한 비유는 셋입니다. 그런데 셋이 같은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첫째는 자기 소유를 맡기고 결산하는 사람입니다([마태복음 25:14-30]). 이름이 종이 아니라 맡긴 사람 쪽에 붙어 있습니다. 이 비유가 누구의 눈으로 보라고 하는지가 제목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종의 자리에 앉아 그날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눈을 잠시 빌려 내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 세어 보는 것입니다.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맡깁니다. 다섯과 둘과 하나입니다. 오랜 후에 돌아와 결산하는데, 다섯 남긴 종과 둘 남긴 종이 듣는 말이 글자까지 같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액수가 다른데 말이 같습니다. 남긴 양을 재는 자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있습니다.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스스로 밝힌 까닭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손이 게으른 것이 먼저가 아니라 눈이 먼저였습니다.
둘째는 열매를 받으려는 주인입니다([마태복음 21:33-44]). 포도원을 세내어 주고 멀리 갔다가 열매 받을 때가 되어 종들을 보냅니다. 농부들이 그 종들을 때리고 죽입니다. 다시 보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에 주인은 아들을 보내며 말합니다.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그런데 농부들은 상속자를 죽이면 유산이 자기 것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포도원이 누구 것인지를 잊은 것입니다. 맡은 자리를 가진 자리로 아는 순간 결산이 무서워집니다.
셋째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는 왕입니다([마태복음 25:31-46]). 심판의 기준으로 여섯 가지가 나옵니다. 주릴 때 먹을 것, 목마를 때 마실 것, 나그네 되었을 때의 자리, 헐벗었을 때의 옷, 병들었을 때의 돌봄, 갇혔을 때의 방문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기준이 아니라 반응입니다. 양쪽이 똑같이 되묻습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그리하였나이까, 우리가 어느 때에 그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오른쪽에 선 이들도 자기가 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세어 두었더라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 왕이 하신 일이 구분이었습니다. 양과 염소를 갈라 세우셨습니다. 그날 왕이 하실 그 구분을,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해 볼 수 있습니다.
셋을 따로 놓으면 투자와 소작과 심판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어 놓으면 한 흐름입니다. 셋 다 맡긴 분이 돌아오는 이야기인데, 묻는 자리가 조금씩 다릅니다. 달란트는 맡긴 분을 어떻게 보았느냐를 묻고, 포도원은 이것이 누구 것인 줄 알았느냐를 묻고, 양과 염소는 누구에게 한 것인 줄 알았느냐를 묻습니다.
그리고 셋 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남깁니다. 맡긴 분의 눈으로 내가 맡은 것을 세어 보는 일, 이것이 누구 것인지 다시 확인하는 일, 내가 어느 쪽에 서 있는지 갈라 보는 일입니다. 셋이 그렇게 물음 하나를 이룹니다. 그날 무엇이 드러나느냐가 아니라, 그 이전에 그분을 누구로 알았느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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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래 다닌 사람이 여기서 막히는가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스스로 밝힌 이유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두려움 앞에서 오래 다니신 분들이 멈춥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 아는 것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아는 것이 늘면 못 한 것도 같이 보입니다. 붙잡지 못한 사람, 끝내지 못한 일, 여러 번 결심하고 여러 번 무너진 자리. 그것이 다 목록이 되어 쌓입니다.
그러다 결산이라는 말을 만나면 그 목록이 한꺼번에 떠오릅니다. 그러면 조용히 이 단계를 접습니다. 천국은 좋은 것이라고만 말하고 그날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설교에서 그 대목이 나오면 마음이 먼저 닫힙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이 틀린 자리는 결산 날이 아니었습니다. 훨씬 전이었습니다.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본 그 자리입니다. 그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두려웠고, 두려웠기 때문에 땅을 팠습니다. 순서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결산이 무섭다는 것은 결산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결산하실 분을 잘못 그렸다는 표시입니다.
장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건물이 도면대로 서고 있는지 살피는 감리 일을 오래 하신 분입니다. 그 일이 몸에 배어 매사가 꼼꼼하고 정직하셨습니다.
그 꼼꼼함은 신앙에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어긋난 것을 견디지 못하셨고 무엇이든 정확한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 한마디 안에 하나님이 다 들어가 계셨습니다. 그분의 성품이 그것 하나만은 아닌데, 나머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드신 자는 정확했습니다. 다만 그 자를 하나님께 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어야 하는지를 재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는 자기가 지은 것 앞에서 드는 물건입니다.
천국사람 6단계로 보면 그 자리가 어디인지 분명해집니다. 6단계에서 겁이 난다면 6단계를 더 공부할 일이 아닙니다. 1단계로 돌아가 그분을 다시 뵐 일입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오르다 만 계단입니까, 아직 다 돌려 보지 않은 면입니까.
그 물음 앞에서 마지막 면은 첫 면과 마주 보고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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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하시는 분이 그 자리에 서 보셨습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는 왕이 마지막에 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40])
왕이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 놓으셨습니다. 심판대에 앉으신 분이 굶주린 자와 갇힌 자와 헐벗은 자를 가리키며 그것이 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실제로 주리셨습니다.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9:28]).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고, 겉옷을 나눠 가지는 것을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보셨습니다. 잡히시던 밤에 끌려가셨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여섯 가지를 열거하신 그 왕이 그 자리들을 몸으로 지나셨습니다.
그러니 그 심판대는 낯선 분 앞에 서는 자리가 아닙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두려웠던 이유가 여기서 풀립니다. 그는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오신 분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분이 아니라 자신을 심으러 오신 분이었습니다. 한 알의 밀처럼 땅에 떨어지신 분입니다.
그러면 그날까지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합니까.
왕은 그날 무엇으로 가르시는지를 미리 다 밝혀 두셨습니다. 여섯 가지가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기준이 감추어져 있지 않다면, 그 구분을 그날까지 미룰 이유도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한 줄을 적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고린도전서 11:31])
살피는 사람이 나 자신입니다. 살피면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날의 판결을 오늘 미리 해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의 이름이 결산하고 판결하는 천국사람입니다.
다만 눈을 빌리는 것이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끝까지 그분이시고 나는 맡은 종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세느냐가 문제입니다. 오른쪽에 선 이들은 자기가 한 일을 몰랐습니다. 이만큼 했으니 나는 양이라고 헤아리는 것은 오히려 양의 자세가 아닙니다. 물어야 할 것은 목록이 아니라 평소입니다. 어려운 사람 앞에서 내 안에 반사적으로 무엇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누구 앞에 서느냐가 전부를 가릅니다.
나를 염소로 찍으면 절망이 오고 양으로 확정하면 교만이 옵니다. 굳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세면 남는 것이 죄목뿐입니다. 아래로 걸어 들어오신 분 앞에서 자기를 세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거기서는 염소의 셈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돌아갈 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양의 셈도 자랑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내 공로가 아닌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여섯 면을 다 돌려 보신 분께 남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첫 면을 다시 보는 일입니다.
1단계는 천국 비밀을 깨닫는 자리였고, 그 자리의 물음은 하나였습니다. 문이 어디에 나 있는가. 답은 아래였습니다. 그분이 아래로 걸어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문을 낸 이와 마지막 날 그 자리에 앉으시는 이가 같은 분입니다.
굳은 사람 앞에서는 땅을 파는 것이 옳습니다. 아래로 걸어 들어오신 분 앞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결산이 끝났을 때 새로 시작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무엇을 보았는지는 그날 다 드러납니다.
그러니 이 여섯 면은 여기서 닫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