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단계 주인처럼 사랑하는 천국사람: 사랑은 한 얼굴이 아닙니다

5단계 주인처럼 사랑하는 천국사람은 천국사람 6단계의 여섯 면 가운데 하나이며, 주인이 집을 비운 동안을 사는 자리입니다. 여섯 가운데 이 자리만 비유가 넷인데, 사랑이 한 얼굴이 아니어서 셋으로는 그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얼굴과 셈을 넘어서는 얼굴과 다 부르는 얼굴과 흘려보내는 얼굴, 넷이 서로를 붙듭니다.

한 방향에서 본 그림으로는 물건을 만들 수 없습니다

도면은 물체 하나를 여러 장으로 그립니다.

앞에서 본 그림, 위에서 본 그림, 옆에서 본 그림. 셋을 나란히 놓아야 형상이 정해집니다. 앞에서만 보면 두께를 알 수 없고, 위에서만 보면 높이를 알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장도 물건이 아닙니다. 셋이 함께 물건입니다.

그리고 물체가 복잡하면 셋으로 부족합니다. 뒤에서 본 그림을 더하고, 아래에서 본 그림을 더하고, 비스듬한 면은 그 면과 마주 보게 한 장을 더 그립니다. 몇 장이 필요한지는 그리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물체가 정합니다.

천국사람 6단계는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열아홉 비유를 여섯 자리에 놓고 읽는 틀입니다. 그중 5단계가 주인처럼 사랑하는 자리입니다. 다섯 단계는 비유가 셋씩인데 이 자리만 넷입니다.

넷인 것은 이 단계가 더 중요해서가 아닙니다. 셋으로는 형상이 잡히지 않아서입니다.

기다리는 사랑만 그리면 무르기만 한 것이 됩니다. 셈을 넘어서는 사랑만 그리면 아무 데나 퍼 주는 것이 됩니다. 문을 다 여는 사랑만 그리면 안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말이 됩니다. 받은 것을 흘려보내라는 말만 하면 갚아야 할 빚처럼 들립니다.

넷이 서로를 붙듭니다.

이 자리를 오해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자기가 잘하는 하나를 사랑 전부로 아는 것입니다. 참는 데 익숙한 사람은 참는 것이 사랑이라 여기고, 베푸는 데 익숙한 사람은 베푸는 것이 사랑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그 하나를 자로 삼아 남을 잽니다.

도면을 읽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본 그림과 옆에서 본 그림을 눈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읽습니다. 한 장을 다 읽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치수 하나가 두 그림에 걸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도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네 비유가 맡은 네 가지 일

천국사람 6단계에서 5단계에 속한 비유는 넷입니다. 넷이 사랑의 네 얼굴입니다.

첫째는 좋은 씨를 뿌린 사람입니다([마태복음 13:24-30]). 밭에 가라지가 섞인 것을 보고 종들이 가서 뽑을까요 하고 묻습니다. 주인은 가만두라 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했습니다. 뽑지 않는 것이 무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직 뿌리가 얽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얼굴입니다.

둘째는 포도원 주인입니다([마태복음 20:1-16]). 새벽에 온 사람과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이 같은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먼저 온 이들이 원망하자 주인이 답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계산이 틀린 것이 아니라 계산으로 풀리지 않는 자리입니다. 셈을 넘어서는 얼굴입니다.

셋째는 혼인 잔치를 베푼 왕입니다([마태복음 22:1-14]). 청함을 받은 이들이 오지 않자 왕은 종들을 사거리로 보냅니다. 만나는 대로 데려오라고 합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데려와 자리가 찼습니다.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문턱은 없는데 예복은 있습니다. 다 부르되 아무렇게나 앉히지는 않는 얼굴입니다.

넷째는 빚을 탕감하는 왕입니다([마태복음 18:23-35]).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나가서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목을 잡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고 한 달란트가 육천 데나리온이니, 탕감받은 것은 붙잡은 것의 육십만 배입니다. 품삯으로 셈하면 이십만 년을 일해야 갚는 빚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에게는 눈앞의 백 데나리온이 더 커 보였습니다. 흘려보내는 얼굴입니다.

넷을 따로 놓으면 농사와 품삯과 잔치와 빚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나란히 놓으면 한 사람의 얼굴 넷입니다. 참고, 넘어서고, 부르고, 흘려보냅니다. 그리고 넷이 저마다 다른 하나를 붙들어 줍니다. 기다리는 얼굴은 셋째 비유의 예복이 아니면 방임이 되고, 셈을 넘어서는 얼굴은 넷째 비유가 아니면 값싼 은혜가 됩니다. 넷이 그렇게 사랑 하나의 형상을 잡습니다.

왜 오래 다닌 사람이 여기서 막히는가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육십만 배입니다. 그 육십만 배가 눈에는 뒤집혀 보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오래 다니신 분들이 멈춥니다.

탕감받은 일은 오래전입니다. 언제였는지 날짜도 흐릿합니다. 그런데 내게 빚진 사람은 지난달에도 그랬고 어제도 그랬습니다. 오래된 것은 작아 보이고 가까운 것은 커 보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눈입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관계 하나가 굳습니다. 예배는 그대로 드리고 봉사도 그대로 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있는 자리를 피할 뿐입니다. 몇 해가 지나면 그 피하는 일이 습관이 되어 아프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 대개 이렇게 정리합니다. 나는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저 사람이 어려울 뿐이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하는 얼굴 하나로 그렇게 정리하는 것이 이 단계의 함정입니다. 참는 것은 잘하는데 흘려보내지 못하고, 넉넉히 베푸는데 기다리지 못합니다. 한 방향에서 본 그림만 들고 물건을 다 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같은 일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사이가 틀어진 부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거의 언제나 같은 자리에 이릅니다. 두 사람이 보고 있는 방향이 서로 전혀 다릅니다. 듣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곧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두 분은 끝까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상대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다름으로 받지 않고, 내 방향이 옳다는 말만 하십니다.

성격 차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차이가 문제였던 적은 없습니다. 차이를 차이로 보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천국사람 6단계로 보면 그 자리가 어디인지 분명해집니다. 5단계는 사랑을 더 많이 하라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아직 그리지 않은 얼굴이 어느 쪽인지 알아보는 자리입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오르다 만 계단입니까, 아직 다 돌려 보지 않은 면입니까.

그 물음 앞에서 사랑이 없다는 말과 한 얼굴만 있다는 말은 다릅니다.

그 밤에 네 얼굴이 한자리에 있었습니다

네 얼굴을 한 사람에게서 다 보는 자리가 성경에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1])

그 밤에 그분은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 자리에 유다도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미 마귀가 그의 마음에 넣었다고 밝혀 두고, 발을 씻기신 뒤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그대로 옮깁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알고도 그 발을 씻으셨다는 뜻입니다.

가라지를 뽑지 않으신 것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같은 대야로 열둘의 발을 다 씻으셨습니다. 삼 년을 따라다닌 사람과 그날 밤에 팔 사람이 같은 물에 발을 넣었습니다. 셈으로 하면 나올 수 없는 일입니다. 새벽에 온 사람과 다섯 시에 온 사람에게 같은 한 데나리온을 준 그 주인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무 말씀도 안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의 문은 열되 예복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야를 물리신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5])

받은 것이 거기서 멈추지 않게 하시려고 본을 보이셨습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에게 없었던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니 주인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사랑을 만들어 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이 이미 그려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도면을 받은 사람이 할 일은 새로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옮기는 것입니다.

천국사람 6단계의 6단계는 결산하고 판결하는 자리입니다. 맡긴 분이 돌아와 물으십니다. 그런데 없는 동안 주인처럼 산 사람에게 그 물음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대야를 내려놓으셨을 때 아직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보이신 것인지는 이미 그 자리에 다 있었습니다.